“그리고 현실 중요하게 생각하는 아버지에게 한마디 하겠습니다. 이것도 현실이에요.”
몇 해 전, 백상예술대상에서 연기상을 받은 연극배우의 수상소감이 화제가 됐다. 휠체어를 타고 무대에 오른 그는, 그에게는 너무 높게 세팅된 마이크 대신, 급히 쪼그려 앉은 스태프가 받쳐준 마이크에 대고 그렇게 말했다. 분명 그 말은 보란 듯이 성공한 아들이 날리는 기쁨의 반격 같은 것이었겠지만, 나는 어쩐지 이번 대선을 지나오며 엉뚱하게 그 말이 떠올랐다.
현실을 이유로 현실이 되지 못하고 가로막힌 꿈들이 너무 많았다. 당위성보다 가능성을 따지는 사람들은 이들의 도전이 진지한 것인지 의심했다. 어차피 가망이 없으니 현실성 없는 공약을 남발하는 거 아니냐는 비아냥도 들려왔다.
그러나 이들은 우리의 현실을 누구보다 직시하는 사람들이었다. 현실은 잔인했다. 어떤 이들은 고공에 있어서 투표조차 할 수 없는 게 우리의 현실이었고, 또 어떤 이들은 해제된 적 없는 차별과 혐오로 일상적 계엄에 시달려온 게 우리의 현실이었다.
이런 현실은 좀처럼 주목받지 못했다. 사람들은 응원봉의 이미지만 챙겨가고 그 불빛이 어디로 향하는지는 제대로 보려 하지 않았다. 지루한 분석만 늘어놓을 뿐, 분노하지 않았다. 당장 죽어가는 존재들이 있는데, 정치란 참 차분하고 느긋했다.
한편 광장을 지나온 이들이 마주해야 했던 또 다른 현실도 있었다. 땅에 있는 위원장이라고 진보에 투표하자고 말하는 것도 아닌 게 우리의 현실이었고, 25억 원이 있다는 61세 남성이 유일한 진보 후보가 된 것도 우리의 현실이었다.
기대로만 가득하진 않지만 포기할 수도 없는 게 우리의 현실이었다. 대통령 하나만 바라보고 있으면 안 되는 것도 우리의 현실이었지만, 절박할 땐 누구라도 붙잡고 매달려봐야 하는 것도 우리의 현실이었다.
그리고 이런 현실들로부터 언제나 얼마큼은 비켜서 있던 게 나의 현실이었다. 어지럽고 끔찍한 말들이 오가는 토론회를 힘겹게 들여다보고 있는 친구들의 마음이 있었고, 스트레스받는 그런 얘기들과는 거리를 두고 싶다고 쉽게 말하는 나의 권력이 있었다.




















